한가위 명절이 다가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명절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아주 많지는 않아 마음에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가족이나 대식가족이라면 명절 음식 준비하는 일이 무엇보다 큰일이겠지만, 그건 집에 따라 다를 테고, 보통 요즘은 본당에 모여 함께 미사로 명절 제사를 대신하는 분들도 많아져서 제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모습의 풍속 변화에 대해 너무 성의 없어 보이는 거 아닌가? 물어 오시기도 합니다.

현실적 답을 드리자면, 집안에서 함부로 그런 말씀 마시라는 겁니다.

나마 있던 명절 음식도 못 얻어드실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유교문화권 안에서 아주 중요한 전통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모습은 천주교 신앙 때문이라기보다는 세태의 변화에 의해 그 전통도 다른 양상으로 변화된 채 지켜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상들을 위해서는 미사를 봉헌하고, 명절을 위한 음식은 후손들이 함께 나눠 먹는 양상입니다. 어쩌면 더 긍정적으로 이해해 볼 만한 모습입니다. 가족들끼리 모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기 좋고요.

하지만, 제사가 동아시아의 천주교 전례와 어떤 관계가 있었던지를 알고 보면 명절을 지내는 성의가 있고 없고를 가름하기보다는 우리가 얻게 된 신앙이 가벼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조촐하게라도 제사를 지내며 신앙의 조상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유교 문화권에 있는 나라에서 조상제사는 매우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입니다. 천주교가 아시아에 전해졌던 시절, 특히 중국에 천주교가 전해졌던 시기에 제사는 어떤 방향에서 이해하는가에 따라 양립가능 혹은 불가로 결정될 수 있는 민감한 주제였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중국 본토를 눈앞에 두고 선종하신 뒤, 그의 중국 선교의 꿈은 마테오 리치라는 걸출한 인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리치는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하면서 조상제사를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였습니다. 유교의 오래된 전통을 우상숭배라는 규정에 매여 설명할 수 없는 무엇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문화인식 덕에 천주교는 큰 충돌없이 중국에 소개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리치의 선교관과는 다른 관점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게 된 선교사들은 미신과 연관지어 제사를 문제시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이에 대해 가능하다 아니다 입장 정리를 하며 백여 년을 지속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은 제사 금지령이 내려졌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중국교회 주교의 지시를 받았던 조선교회 초기에도 당연히 제사가 금지됐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에서 벌어졌던 박해는, 이 금지령을 너무나 충실히 지킨 나머지 그것이 화근이 되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 베이징 교구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과 베이징의 지침을 따르던 조선 지역에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살던 선비 윤지충(바오로)과 그의 사촌 권상연(야고보)이 벌인 이 사건은 정치적 세력 싸움과 맞물려 조선교회에 엄청난 박해를 몰고 왔습니다. 결국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과 함께 전국의 모든 서학(천주학)서적을 불태워 버리도록 명한 신해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가톨릭 대사전 참조)

이렇게 시작된 박해의 시기는 거의 백 년이나 지속되었으며 1882년에 암묵적 종교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1885년이 사실상 자유를 얻은 때로 기록됩니다. 그동안 여러 번의 박해를 당하고 얻은 신앙의 자유였으나 그것이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던 제사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조상 제사를 교황청이 허용한 것은 1939년의 일인데, 결과적으로 시기가 부적절해 보이는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보다 앞서 1936년에 일본 교회의 신사참배를 허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하실 수도 있으나 그때 조선은 일본 식민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티칸이 일본 왕들을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일본교회에 허용하였다는 것은 결국 조선 지역의 신자들도 신사참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고, 범위를 넓혀 중국과 조선의 제사 문제도 금지할 근거가 사라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는, 교회가 조상 제사를 허용한 것은 신사참배를 최종 허용 결정하는 데서 파생한 결과였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졌다고 해도 말입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교회의 역사(제2부 4장) 참조)

천주교회는 동아시아에서 오랜 세월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당시 독일, 이탈리아와 손잡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려 했던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교회를 보호하고자 했던 고육책이었던 것이라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라면.... 비겁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그럴 것을 생각했다면 차라리 제사 금지령이나 내리지 말지.... 아쉬움이 생깁니다. 교회가 멀리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가 보여 준 유연함이 많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되찾은 제사입니다. 설령 제사 대신 미사로 명절을 넘기시려 했다고 해도, 간단하게라도 제사상 마련해 두시고 우리가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며 겪었던 수난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눠 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천주교 제례에서는 위패를 빼고(좀 더 정확히는 위패의 학생 부군 신위(神位)에서 신(神) 자를 빼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영정 사진을 두라고 지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여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해 준 조상들이 계시다면 우리는 그들을 충분히 작은 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요한 10,34)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 신이기 때문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