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교회의 지향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자문해보며..

공감이 되는 묵상이 있어 옮겨보았습니다. 

 

연중 제 3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루카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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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못 보는 사람이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다.
군중들의 웅성거림에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앞서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러댄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볼 수 있게 하셨다는 이야기다.

앞을 못 보기에 유일한 생존 방법으로 구걸을 선택했던 사람의 간절하고 절박한 입장은

눈을 뜨게 될 지도 모르는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남들의 윽박지름에 아랑곳 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소문으로만 듣던 그분께서 자신이 구걸하고 있는 곳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 알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저 큰 소리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그분께 알리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말 그대로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이들은 왜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 했을까?
그리고 그 앞서가던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모르긴 해도,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중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아직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그 걸인에게 윽박지르기보다는 그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 걸인을 윽박질렀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잘못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을 위해 하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일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다가서려는 이들을 이끌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먼저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그분을 위한 행동이라 말해야 한다.
가진 것이 없다 해서, 내세울 것이 없다 해서 교회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소리가 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몇몇 영향력 있는 이들이 중심이 된 사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과 기도가 없는 사회봉사단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단체의 규칙을 운운하면서 배타적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건강한 비판이 들리지 않도록 사목자의 귀를 멀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최선을 다해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누구나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우선적으로 힘들 때 찾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또한 기쁨을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